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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 영화 <재심>: “내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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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투데이 작성일17-03-13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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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재심
<재심>에 나온 현장검증 장면. 형사들의 고문에 의해 피의자 조현우가 상처입은 모습이 보인다.

군사독재정권의 유산: "이 형사의 수사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느껴왔어요" 

영화 <재심>이 담아내고 있는 실화,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 수사에 드러난 문제의 본질은 공권력의 폭력적이고 부당한 행사로 인한 심각한 인권침해라고 볼 수 있다. 고문에 의한 자백 및 진술서는 아무런 증거능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담당형사들과 검사가 일련의 모의를 거쳐 당시 15세였던 단순 목격자인 최모 씨를 살인혐의자로 몰아세운 것이다. 

단지 재판부의 오심에 의해 억울하게 누명을 썼다 해도 심각한 일인데, 이 사건은 애초에 수사과정 전체가 고문과 증거조작으로 점철돼 있었다. 형사들이 모텔이나 경찰서 내 격리된 장소에 피의자를 가두고 3-4일씩 잠을 재우지 않은 채 폭행하고 고문하는 행태는 박정희, 전두환 군사독재 시절 흔히 행해지던 관행이었다. 특히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와 관련된 공안사건들은 거의 다 이런 수사관행을 따랐다. 

영화 <재심>은 바로 이런 수사방식에 의해 주인공 조현우(실존인물 최모 씨, 강하늘 분)가 육체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무너져 가는 모습을 집중 조명하고 있다. 그가 당한 부당함의 정도가 심하면 심할수록, 관객들의 마음 속에는 국가 공권력과 사법제도 전반에 대한 회의와 불신이 무럭무럭 자라난다. 

공권력에 대한 회의: "법이라는 것이 진짜로 사람 보호하려고 만든 것이여?"

이런 사건이 하나 둘씩 폭로될 때마다, 사람이 만들어 낸 정치∙행정∙사법제도의 신뢰성에 대한 근원적 회의감을 쉽게 거부할 수 없게 된다. 사실 공권력에 대한 우리 기독교인의 태도는 겉보기에 이중적으로 보일 수 있다. 공권력의 공의로움에 대해 근본적으로는 회의하면서도 거기에 순응하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의 소망이 이 땅의 육체적 삶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부활 후 천국에 정향돼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은 저 하늘을 향한 소망이 심각하게 저해되지 않는 이상, 정치권력에 대해 전반적으로 순응하는 태도를 갖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살아간다. 

기독교인들은 주 예수의 재림 시 이루어질 최후의 심판만이 오직 절대적으로 공정하고 공의롭다는 신앙을 갖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 대비해 사람을 수사관, 검사, 재판관으로 삼는 이 땅의 행정∙사법제도는 어떤 경우라도 '절대적' 공정함을 확보할 수 없다는 것을 충분하게 인지하고 있다. 

흔히 기독교적 정치관의 모범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되는 칼빈(John Calvin, 1509-1564)의 견해를 살펴보자. 세속 집권자들에 대하여 칼빈은 다음과 같이 평한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일반 군주들은 당연히 유의해야 할 일에 등한하며 아무 관심도 없이 자기의 쾌락만을 추구해 왔다. ... 또 어떤 이들은 순전히 강도질을 하고 집을 털며 부녀자를 강간하며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한다. ... 성경은 지배자의 존귀성과 권위를 가르치지만 이런 사람을 지배자라고 인정하지 않는다(<기독교 강요>,  IV. 20. 24)." 

영화 재심
재심 승소를 위해 분투하는 이준영 변호사에게 조현우는 묻는다. “법이라는 것이 진짜로 사람 보호하려고 만든 것이여?”

그러나 이처럼 근원적 회의감을 전제하고 있으면서도 기독교인들은 자신이 속해 있는 국가의 행정∙사법제도의 권위와 질서를 존중하고 거기에 순응하려 한다. 그것이 신앙의 본질적 요소들을 침해하지 않는 한 언제나 그러하다. 칼빈 역시 이런 자세를 가르친다. "우리는 우리에 대해 공정하고 충실하게 직책을 다하는 군주들의 권위에 복종해야 할 뿐 아니라, 어떤 수단으로든 권력을 잡은 사람들이 비록 군주로서의 직책을 조금도 이행하지 않더라도 그들의 권위에 또한 복종해야 한다(<기독교 강요>, IV. 20. 25)."'

 

이런 가르침은 오늘날 민주주의가 최고로 발전된 정치제도라고 배워온 우리들의 정서에는 낯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원래 민주주의도 성경에서 권장하는 정치체제는 아니라는 점이다. 성경이 권장하는 정치제도는 한때 이스라엘 민족의 치리방식이었던 왕정제도, 그것도 인간이 아닌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절대왕정제도이다. 

신정정치의 쇠락: "이단자들과 신성모독자들을 죽이는 일이 잘못됐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고의로 죄를 짓는 것이다(John Calvin)." 

역사적으로 기독교회는 때로는 불가피하게, 때로는 의도적으로 신정정치 제도(theocracy)를 이 땅에 구축해 보려는 야심찬 시도를 감행한 바 있다. 칼빈과 같은 이는 시의회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16세기 제네바(Geneva) 시(市)에 신정정치 제도를 확립했다. 17세기 아메리카 식민지 뉴잉글랜드(New England: 오늘날 미국 북동부 대서양 연안의 Massachusetts, Connecticut, Rhode Island, Vermont, Maine, New Hampshire 등 6개주) 지역의 촌락들 대부분은 청교도 목회자들이 주도하는 신정정치제도에 의해 다스려졌다. 

그리고 이런 시도들은 자주 억울한 죄인들을 다수 양산하는 문제점들을 야기하였다. 물론 이들의 신정정치가 완전히 역기능적인 방향으로만 작동됐던 것은 아니다. 문화 전반을 기독교 정신 위에 세우고, 기독교적 윤리를 중시하는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며, 보편적 복지를 위해 힘썼다는 점에서는 그 어떤 정치제도보다도 출중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이도 온전한 정치제도가 될 수 없었다. 특히 우리가 지금 논하고 있는 영화 <재심>의 사례에서처럼, 억울한 이에게 누명을 씌우고 부당한 형벌을 가하는 데 적극적이었다는 점에서 그 역기능적 성격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칼빈은 강압적으로 제네바 시민들의 순종을 유도하기 위해 자주 작은 죄를 크게 부풀려 희생양을 삼는 행태로 악명이 높았다. 그가 제네바 시의회의 비호를 받고 있던 시기, 최소 78명 이상이 비교적 사소한 종교적 문제로 교수형이나 화형에 처해졌고 그보다 많은 수가 추방을 당했다. 이 일을 칼빈이 주도했느냐 아니냐에 대해서는 아직도 역사적 논란이 있지만, 적어도 칼빈이 과도한 법 집행에 의해 죽어간 억울한 이들의 처지를 방관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뉴잉글랜드의 경우 주요 촌락 중 하나였던 세일럼(Salem)에서 마녀 재판(witch hunt)이 진행돼 19명의 무고한 인명들이 오해와 모함에 의해 잔혹하게 처형을 당했다. 과연 칼빈의 일벌백계식 누명 씌우기(혹은 그에 대한 방관)와 세일럼의 마녀사냥이 진정 하나님이 원하시는 통치방식의 일환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영화 재심
칼빈의 정치관을 대변하는 말. “누구든지 이단자들과 신성모독자들을 죽이는 일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무엇이 옳은 일인지) 알고도 짐짓 죄를 범하는 것이다.”

칼빈과 청교도들이 이런 역사적 실책으로 빠져들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앞서 말한 대로 이들이 내세웠던 신정정치 제도 역시 궁극적으로는 사람에 의한 정치제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성경에 대한 불완전한 해석, 권력에 대한 끝없는 탐욕, 시민들에 대한 사랑과 배려 없는 엘리트주의적이고 관료적 태도로 인해,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정치권력을 남용하게 됐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정당하게 정치권력을 위임받았다고 주장한 신정정치 제도조차 결국 사람에 의한 불완전한 시도로 귀결되고 말았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옥에 갇혔을 때 돌아보는 자: "내가 법정에서 증명해 줄게, 너 절대 살인범 아니라고!" 

사람에 의한 정치가 어떤 방식으로든 허점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면, 기독교인들은 그 정치제도에 의해 희생되는 억울한 이들이 나올 때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태도로 방관해야 할까? 전혀 그렇지 않다. 부당하고 악독한 집권자라도 순응하라는 것은 그 집권자 자체에 대항하는 혁명이나 정권전복을 시도하지 말라는 것이지, 법에 명시적으로 보장된 구제와 해명의 기회마저 포기하라는 것은 아니다. 

칼빈도 역설한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집권자들이 쓸데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이 사람들은 복수를 하거나 소송을 제기하거나 법에 호소하는 것이 금지되었으므로 경건의 입장에서는 집권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바울은 분명히 여기에 반대해, 관원들은 우리의 유익을 위한 하나님의 사자라고 단언한다(롬 13:4). 

사도의 뜻은 하나님께서 집권자를 임명하셨다는 것이며 또 우리가 집권자의 도움과 지지를 받아 악인들의 악행과 불의의 희생이 되지 않고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할 수 있게 하셨다는 것이다(딤전 2:2). 우리가 이런 혜택을 입는 것이 불가하다면 하나님께서 집권자를 주셔서 우리를 보호하게 하신 것이 무의미하게 된다(<기독교 강요>, IV. 20. 17)." 

이런 가르침 때문에 서구 근대의 법치주의 국가들에서 기독교는 늘 부당하게 억압받고 고통받는 자의 보호자요 변호인을 자처했다. 신정정치의 폐단을 경험한 기독교회는 이제 스스로 입법과 사법의 주체가 되려하기보다는 국가의 행정∙사법제도에 의존해 억울하게 고난받는 자들의 구제를 요청하는 쪽으로 법의 혜택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영화 재심
부당하게 억압받는 약자들을 위한 변론은 원래 기독교의 기본정신 중 하나이다.

전편에서 억울하게 누명을 쓴 사람의 사례로 <몽테 크리스토 백작(Le Comte de Monte-Cristo)>의 이야기를 언급한 바 있다. 물론 이는 픽션이지만, 그 속에 담긴 기독교회에 대한 기대는 가상이 아니라 진짜였다.

 

 

몽테 크리스토라는 이름 자체가 그리스도(Χριστός)의 이름을 빌린 것임을 유념하자. 선량한 주인공 에드몽 당테스(Edmond Dantès)가 억울하게 누명을 쓴 것(그리스도의 재판), 죽음을 가장하고 바다에 던져진 것(십자가에 죽으심), 그리고 물 위로 끌어올려져 다시 세상으로 나간 것(그리스도의 부활)은 모두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으로부터 영감을 얻은 이야기들로 풀이된다. 

즉 기독교는 죄 없는 이가 죄를 뒤집어 쓰고 죽으신 그 은혜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부당하게 억압받는 모든 사람들의 삶을 동정하고 그들의 구원을 위해 힘쓰는 신앙으로 이해돼 왔다. 원래 변호인이라는 직무 자체의 기원도 율법 앞에서 자신을 변호할 능력이 없는 인류를 하나님 아버지와 중재시키신 보혜사(保惠師, Counselor) 그리스도가 아니셨던가. 

주인공 당테스가 아무 희망 없이 고도(孤島)의 정치범 수용소에 갇혔을 때 그에게 탈옥의 길을 알려주고 학식을 채워주며, 막대한 재산이 숨겨져 있는 곳까지 알려준 사람은 가톨릭 성직자 파리아(Abbé Faria)였다. 소설 원저자 알렉상드르 뒤마(Alexandre Dumas)가 기독교에 대해 기대하는 바가 무엇인지 명백하게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세상의 악행과 불의에 희생된 자들의 편을 서는 것, 형제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고, 나그네 됐을 때에 영접하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히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는(마 25:35-36)" 것이 기독교의 실천이라는 점을 뒤마는 알고 있었다. 

<레미제라블(Les Misérables)>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장 발장(Jean Valjean)의 구원과 거듭남 역시 미리엘 주교(Bishop Myriel), 즉 가톨릭 성직자를 통해 이루어진다. 서구적 정황에서는 억울한 이들이 기독교의 힘으로 누명을 벗거나 보상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인식이 널리 통용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한국도 한 때는 민중신학이라 하여 기독교가 정치제도의 억울한 희생자들을 달래고 그들의 구제를 위해 힘쓴 적이 있었다. 물론 과도하게 사회주의적으로 편향된 감이 있어 기독교 신학계에서 주류 취급을 받지는 못했으나, 적어도 기독교가 정권의 악행과 불의에 의해 부당하게 억압받는 자들 편이라는 사실만큼은 여실하게 증명해 주었다. 

영화 재심
1세대 민중신학자로 분류되는 안병무(왼쪽), 서남동(가운데) 교수. 비록 주류신학자로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기독교가 사회적 약자들의 인권보호와 변론을 위해 힘썼음을 보여주는 증인들이다.

그러나 <재심>을 통해 우리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약자들, 억울한 처지에 있는 자들이 기독교에 대해 별반 기대하는 바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그것은 기독교가 더 이상 "형제가 옥에 갇혔을 때 돌아보는" 역할을 수행하지 않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작품 초반에 등장하는 이준영 변호사는 사실 정의로운 인권변호사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거대 로펌으로부터 실력을 인정받아 파트너 변호사로 채용되기 위해 약촌오거리 살인사건의 재심 변호인으로 자원한다. 작중 이준영 변호사의 실존모델인 박준영 변호사도 인터뷰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학벌이 없고 배경이 없고 하다 보면, 사법시험 합격했다는 것 자체만 놓고 본다면, 고등학교만 나오고 대학교 1년 중퇴가 대단하다고 생각하는데... 합격한 이후에는, 그 변호사 업계에 들어간 순간부터는 저는 그렇게 대우를 받는 변호사가 될 수 없습니다. ... 제가 한 번 제대로 잘 나가고 싶었거든요. 그 사건(수원역 노숙소녀 살인사건 재심)으로." 

물론 지금도 박준영 변호사가 여전히 속물적인 생각으로 약자들의 편을 드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는 계속해서 수임료도 내지 못하는 억울한 자들의 변호인 역할을 자처하며 개인적 이익을 별로 얻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재심>을 관람하며 묻고 싶었던 것이 있다. 억울한 자의 편을 들어주는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법조인들이 기독교계에 상당히 많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왜 최근에는 그런 역량을 가진 교회나 교인들이 약자의 변호를 위해 나섰다는 소식이 거의 들리지 않는 것일까? 

영화 재심
어느 언론사는 박준영 변호사와의 인터뷰 기사 제목을 다음과 같이 작성하였다. “하나도 거룩하지 않은, 그러나 소금 같은 변호사 박준영”. 원래 ‘거룩한’은, 기독교 신앙을 가진 성도(聖徒, ‘거룩한’ 제자)가 담당했어야 할 역할이었다는 뜻 아닐까? ⓒ한겨레 캡처

지난해 모 대형교회 집사이자 검사장 출신의 한 변호사가 전관예우 관행을 통해 2년 만에 100억 원 가까운 소득을 올린 일이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바 있다. 뿐만 아니라 이 변호사가 자신이 출석하는 교회 담임목사의 교회 내 비리를 은폐하는 데 법적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는 의혹도 제기되었다.

 

 

음지에서 이런 의혹들이 자주 제기되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는 많은 대형교회 법조인들이 자기의 이익이나 일부 교회 지도부의 부당한 이익 보호를 위해서는 발벗고 나서면서, 약자를 돌아보고 변호하며 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데 자원해서 나서는 일이 거의 목격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미래사회의 수사와 재판: "판사님, 이의 있습니다. 원칙에 따라 재판을 진행했으면 좋겠습니다!" 

<재심>과 관련해서 마지막으로 논의하고 싶은 주제는 다가오는 제4차 산업혁명이 미래의 사법제도에 미칠 영향에 대한 것이다. 제4차 산업혁명은 인공지능(A.I., Artificial Intelligence)의 발전에 의해 초래되는 산업환경의 혁명적 변화를 뜻한다. 

클라우드 컴퓨팅(cloud computing) 체계에 개념적 기반을 둔 빅데이터(big data) 기술이 발전하면서, 현재의 인공지능은 단지 제한적으로 설정된 알고리즘(algorithm)을 따라서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딥러닝(deep learning, 인공지능 스스로 특정한 방식의 배움을 능동적으로 수행하여 문제해결 능력을 극대화하는 것)이 가능한 단계까지 발전된 상태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형사사법 절차나 법률 서비스 시장에 인공지능을 도입하는 연구 역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영국 법철학자 리처드 서스킨(Richard Susskind)은 IT기술과 인공지능의 발전이 사법제도와 법률 서비스 시장에 미칠 영향에 대해 연구하는 대표적 학자들 중 한 사람이다. 

서스킨에 의하면, 현재 소송을 위해 필요한 여러 법률적 서비스들, 예를 들어 소장(訴狀) 작성이나 법률상담 등이 가장 먼저 인공지능에 의해 주도될 것이며, 그 외에 기존 판례를 기초로 한 판결에 대한 예상이나 민형사상 합의를 위한 중재까지 변호사의 개입 없이 인공지능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각국의 형사사법 절차 역시 빠르게 디지털화되고 있다. 기존 종이문서로 작성∙보관하던 범죄 및 형사정보들이 디지털화된 자료로 변환되고, 이로 인해 빅데이터를 이용한 사법 인공지능의 딥러닝 속도 역시 가속화될 전망이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이미 뉴욕경찰청(NYPD) 등 일부 지역경찰청들을 중심으로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을 이용한 자체 범죄예측 시스템을 운용하고 있다. 

사법 인공지능 연구를 주도하는 이들의 궁극적 목표는 수사판단 단계로부터 시작해 판사, 검사, 변호사의 역할까지 인공지능이 일사천리로 진행하는 전자법정의 구현이다. 과연 이것이 불가능한 일일까? 그리고 아주 먼 미래의 일일까? 

사법절차 및 법률 서비스 전반이 전적으로 인공지능에 의해 주도되는 시대가 언제 도래할지는 아직 명확하게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사람들의 인식 속에는 그때가 되면 사법제도가 보다 공정하게 작동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미리 조성돼 있을 것이다. 전관예우,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 고무줄 형량 등 부조리한 관행으로 점철된 수사∙재판제도에 회의감과 염증을 느끼는 국민들 절대 다수는 누구나 법 앞에 평등할 수 있는 전자법정의 도입을 열렬히 환영할 것이다. 

물론 법조계가 이른바 '밥그릇을 지키려는' 의지로 그 도입 시기를 늦추려 안간힘을 쓸 것이나, 사법 인공지능 발전의 대세는 이미 완벽한 전자법정의 구현으로 기울고 있다. 

영화 재심
법집행과 재판의 부당함에 지친 나머지,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인공지능에 의해 주도되는 법정의 개발과 설치를 환영하는 추세로 전환되고 있다.

<재심>에 묘사된 것과 같은 부조리한 수사나 재판의 발생 빈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법질서 수호와 사법적 정의 구현 임무를 사람이 아닌 인공지능에게 맡기게 되는 시기가 더 앞당겨질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소송 한 건의 판결에 수 개월에서 수 년씩 걸리는 재판절차가 단지 수 초에서 수 분으로 앞당겨질 수 있기 때문에, 이 분야의 발전에 대한 기대감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영화 <저지 드레드(Judge Dread)>에서나 볼 수 있었던 즉결심판 및 형벌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최근 대통령 탄핵심판에 소요된 92일이라는 시일을 단 하루로 줄일 수 있다고 한다면, 많은 이들이 인공지능에 의해 주도되는 전자법정을 열렬하게 환영하며 수용하려 하지 않을까? 

우리의 신앙은 분쟁조정과 죄의 수사, 심판과 형벌의 근원적 권세가 모두 하나님께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법이라는 장치를 통해 사람에게 수사와 재판과 형벌의 권한을 위임해 주신 것으로 믿는다. 그런데 수사기관과 재판관이 부패하고, 교회는 억울한 약자들의 편을 들어주지 않으니, 이 모든 권한을 인공지능에 위임하는 것이 차라리 낫다는 인식이 갈수록 커져가고 있는 듯하다. 아직은 제한적이지만, 갈수록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권한을 임의적으로 가공된 지성에 맡기게 되는 상황을 맞이할 것이다. 

영화 재심
영화 <저지 드레드>의 한 장면. 즉각적인 재판과 심판을 수행하는 판사들이 등장한다. 인공지능이 법 집행과 사법제도를 주도하게 되는 미래에는 경찰관이 사건에 대한 보고를 올리자 마자 즉각적으로 수사판단과 판결, 형벌 내용까지 지시받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기독교인들의 무능과 심각한 직무유기의 결과라 할 만 하다. 바울 사도는 말한다.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고전 6:2)?" 기독교적 신앙에 기초한 올바른 판단이 희소해질수록,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귀한 권한을 방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고 반성해야 하지 않을까 반문하고 싶다.

 

결론적으로 <재심>을 관람하며 들었던 생각은, 우리가 단지 대한민국 공권력과 사법제도의 부조리한 면모를 확인하고 분노하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왜 이런 부조리에 대응하는 일에 교회가 적절한 권한 내에서 올바른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는지, 그리고 이런 무관심과 직무유기가 향후 변화되는 세태 속에서 우리들에게 어떤 문제를 야기할 것인지에 대해 진지하고 절실하게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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