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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자신의 정체성 알려면… 역사의 자취를 살펴보라

조회 236|2019-08-27

책벌레

 


 

[크리스찬북뉴스 서평] 교회, 역사를 통해 하나님을 드러내라

 

과거의 의미

로완 윌리엄스 | 양세규 역 | 비아 | 240쪽 | 15,000원

 

“시간의 주인이시여, 아브라함과 사라를 부르셔서 우리의 조상이 되게 하심으로써 당신은 이 시간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신학자인 스탠리 하우어워스 기도문의 일부입니다.

 

이 기도문을 처음 접했을 때, 마태복음 1장의 족보가 생각이 났습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족보는 예수의 탄생까지 이어집니다.

 

마태복음 1장의 족보는 단순히 예수의 조상들을 열거하는 객관적 족보가 아닙니다. 철저히 마태의 관점에서 재해석된 족보입니다. 학자들은 최소 4명에서 많게는 20명이 그 족보에서 누락된 것으로 봅니다.

 

또 14대라는 묘한 조합은 다윗이라는 히브리어 숫자가 14이기 때문에 의도적인 것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결국 마태복음의 족보는 예수가 ‘다윗의 후손’인 것을 강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해석한 역사인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에게 ‘역사’는 존재의 의미만큼 소중합니다.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성>까지 언급하지 않더라도, 성경은 하나님이 시간의 창조자요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확고하게 증언합니다.

 

창조에서 종말까지 이어지는 역사는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는 ‘구속사’입니다. 하나님의 구속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바로 ‘교회’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로완 윌리엄스는 기독교인들이 왜 지나간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가에 질문을 던집니다. 웨일즈 출신으로서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된 이력을 가진 로완 윌리엄스는, 서사적 설교와 존재론적 성경해석으로 독특한 이해를 가진 분입니다.

 

어려운 주제를 쉽고 간결하게 풀어내며, 명료하면서도 심오한 신학적 서술들은 독자들로 하여금 복음의 신비에 몰입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성공회 학자로서 교회사를 논한다는 점에서, 장로교회에 익숙한 저에게는 별미를 맛보는 즐거움을 선사해 주었습니다.

 

지금 한국은 일본과의 무역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만약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36년의 식민지 시간을 갖지 않았다면 지금의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일어날 수도 있겠지만 일어나지 않을 확률은 훨씬 높을 것입니다. 현재는 과거에서 태어났고, 미래는 현재가 잉태한 것입니다. E. H. 카의 주장처럼, 역사는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역사에 대한 다른 해석, 관점을 가져야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시기를 ‘혁명’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이전의 시대가 전복되고, 전혀 새로운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윌리엄스는 프랑스 철학자 미셸 드 세르토의 말을 인용하여 “역사와 혁명은 함께 태어난다”고 말합니다. 혁명은 기존의 가치와 역사관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것을 전복하고 새롭게 시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역사는 그 사회와 집단 구성원들이 가진 “집단 기억을 정리(19쪽)”하는 것입니다. 역사는 기억이고, 혁명은 역사에 대한 ‘재정의(22쪽)’인 셈입니다. 신약성경 역시 혼란과 핍박이 휘몰아치는 위기의 순간에 신학적 해석을 통해 역사를 재구성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성서는 과거에 일어난 사건에 대한 단순한 기록이 아닙니다. 우리가 읽는 문헌은 공동체, 혹은 집단을 분열시키고 붕괴시키며 혼란 속에 빠뜨리는 힘을 지닌 사건들을 이해하기 위해 일련의 기억들을 창의적이고도 혁신적인 방식으로 재구성해 쓴 이야기입니다(22쪽).”

 

신약성경이 쓰일 당시 팔레스타인은 형언하기 힘든 혼란과 격동의 시기였습니다. 예루살렘은 친로마파와 독립파로 분리돼 서로를 향해 칼을 들이대며 으르렁거렸습니다.

 

결국 71년 디토 장군은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피가 발목에 차오르도록 남김없이 예루살렘에 있던 유대인들을 몰살시켰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로마가 아니더라도 기존의 유대인들은 기독교인들을 이미 핍박했고, 자신들의 공동체에서 추방시켰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역사를 새로 써야할 필요가 생긴 것입니다.

 

신약성경은 역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며, 혁명이며, ‘위대한 시도의 산물(25쪽)’인 것입니다. 복음서 저자들은 구약의 예언이 자신들(기독교인)에게 성취됐고, 예수를 통해 새로운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구약의 증거들로 인해 증명하고자 했습니다.

 

또 하나의 의도는 이방인들, 즉 “낯선 이들과 세계를 공유하는 것(28쪽)”입니다. 윌리엄스는 신약의 저자들이 역사를 기술할 때 두 가지를 신학적 의미가 있음을 지적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은 한결같은 분이라는 점, 다른 하나는 하나님과 맺은 관계는 시간, 공간, 언어, 문화적 차이라는 제약을 받지 않는 인간 공동체의 기초가 된다는 점입니다(29쪽).

 

어거스틴을 비롯한 유세비우스 같은 후대의 기독교 역사들은 교회사를 서술하면서 교회의 생명을 유지하는 힘이 무엇인지 밝히고, 성경이 제시하는 하나님의 활동이 교회의 이야기 속에서 어떻게 재현되고 있는가를 드러내려 했습니다(37쪽).

 

기독교인의 역사 쓰기는 혁명의 시기에 다시 시작됩니다. 중세 교회의 타락으로 인해 마르틴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가들은 교회사를 새로 써야 했습니다. 그들은 신약성경의 저자들이 썼던 방법론을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하나는 자신들의 새로운 교회가 초대교회의 전통 즉 연속선상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타락한 중세교회의 차별성을 두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역사를 다시 정의하고 해석했습니다.

 

그들은 먼저 현재를 ‘문제화(problematising)’시켰습니다. 현재의 역사에 의혹을 제기하고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종교개혁가들이 두 번째로 한 일은 교부들의 문헌을 다시 읽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들은 “대중과 로마 가톨릭 반대자들이 익숙하게 여기던 전통을 낯설고 새롭게 만들어 보여주려(50쪽)” 했던 것입니다.

 

물론 가톨릭 신학자들은 종교개혁가들의 해석에 반해, 자신들의 교회가 진정한 정통이라고 교부들을 인용합니다. 전통 그리고 정통은 ‘우리가 어디에 연결되어 있는가’에 대한 해석의 결과입니다. 로완 윌리엄스는 이제 명료한 한 가지 역사에 대한 관점을 제시합니다.

 

“좋은 역사 서술은 현재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들에 사로잡힌 우리를, 즉 우리 정체성에 대한 관습적인 사유로부터 우리를 벗어나게 해줍니다. 반면 나쁜 역사 서술은 이러한 지난한 과정, 정체성의 확장을 거부하고 가로막습니다. 거짓 역사는 우리에게 과거를 외양만 바꾼 현재로 제시하거나 야만과 무지로 가득 찬, 완전히 ’낯선 나라‘로 제시해 배척하고 거부하게 만듭니다(59쪽).”

 

참으로 매력적인 역사에 대한 서술입니다. 지금까지 읽었던 기독교 역사관에 대한 그 어떤 책보다 명료하고 좋은 책이라고 감히 말합니다.

 


▲저자 로완 윌리엄스. ⓒoxford.com

 

특히 2장에서 거류 외국인으로서의 ‘초대교회 정체성’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현대교회가 잃어버린 ‘하나님 나라’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게 도와줍니다.

죄에 대한 회개와 고백이 교회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새롭게 한다는 서술은 도덕적 죄의 개념에 함몰된 신학적 나태성에 비수를 꽂았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는 고백을 통해 우리가 실패한 존재임을, 우리가 도움을 필요한 존재임을 드러냅니다(111쪽).”

 

인간의 완전성을 주장했던 도나투스파를, 고백을 통해 격파한 것입니다. 동시에 그럼에도 교회는 끊임없이 거룩해지기를 몸부림쳐야 한다는 것을 <고백록>을 통해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루터는 이것을 받아들였고, 그의 관점에서 역사를 재해석했고, 스스로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회개하고 고백합니다. 이러한 개념들은 “죄인인면서 동시에 의인”이라는 루터의 인간론에 잘 담겨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루터는 하나님의 의에 지나치게 몰입한 나머지, 당연히 져야 할 도덕적 의무와 가난한 자들에 대한 구제까지 내려놓고 말았습니다. 물론 루터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가 가진 역사관은 ‘의무’를 의혹의 눈초리를 가지고 해석함으로 ‘율법적’이라는 왜곡된 시각으로 획일적으로 재평가해 버린 것입니다.

 

루터뿐 아니라 이후에 일어난 종교개혁가들은 가톨릭과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국가주의와 결탁하고, 심지어 국가와 교회를 일치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수동적으로 국가 체제에 ‘순응(157쪽)’했고, 적극적으로는 성공회 신자들처럼 ‘대영제국의 패권이 하나님의 섭리에 따른 것이라고 옹호(157쪽)’하기도 했습니다.

 

역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얼마든지 왜곡되며 그릇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과거의 역사를 살펴보고 이해한다는 것은 현재를 이해하는 필수적인 과정입니다.

 

교회는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변하지 않는 진리를 담지한 생명의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은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새겨 나가십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인이며, 하나님의 활동이며, 하나님의 자기 전달입니다(190쪽).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요? 현대 우리가 옳다고 말하는 교회 상과 이미지는 어디서 온 것일까요? 로완 윌리엄스는 교회가 자신의 정체성을 바로 알기 위해 과거로 되돌아가, 역사의 자취를 살펴보도록 권면합니다.

 

귀하고 아름다운 책입니다. 깔끔한 번역과 편집도 가독성을 높여 주기에 충분합니다. 교회를 사랑하고, 진리를 소중히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책을 권합니다.

 

정현욱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인, 에레츠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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