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크리스천

기도는, 내 안에 하나님을 채우는 것이 아니다

[크리스찬북뉴스 서평] 기도가 되는 삶, 삶이 되는 기도 |

조회 339|2019-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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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자의 기도

스탠리 하우어워스 | 정다운 역 | 비아 | 384쪽 | 13,000원

 

삶의 맥락 없는 기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기도는 교조적 지식과 정교한 신학적 체계로 흘러나오지 않는다. 기도는 영혼의 울림이며, 실존의 발로이다.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기도는 더더욱 그렇다. 그는 수년 전 <한나의 아이>를 통해 자신의 삶의 여정과 모호한 인생 속에서 하나님을 찾아가는 여정을 담담히 그려냈다.

 

이 책, 그러니까 <신학자의 기도>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그의 기도문은 그의 신학과 신앙, 존재의 실존이 사유의 충만과 영혼의 고뇌를 통해 고백된 것들이다.

 

“이 기도들은 꾸밈없이 평범합니다.”

 

그는 말한다. 자신의 기도가 평범하다고. 왜? ‘평소에 하는 말과 동떨어진 기도를 드릴 수 없기 때문이다’고 고백한다.

 

그렇다. 기도는 삶의 맥락 속에 있다. 기도는 삶의 일부이자, 삶 자체이다. 좁은 의미에서 삶과 기도를 구분할 수는 있으나, 분리할 수는 없다. 삶이 기도이고, 기도가 삶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살아가는 방식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명령이자 인간의 본성이다. 종교 없는 민족은 없다. 기도하지 않는 종교도 존재하지 않는다.

 

기도는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심어놓은 ‘하나님’, 즉 신에 대한 깊은 구멍에서 흘러나온다. 그 구멍은 하나님이 아닌 이상 그 어떤 것으로도 메꾸어지지 않는다.

 

오래 전 읽은 전래 동화와 기도가 많이 닮았다고 생각한다. 나쁜 사또가 가난한 농부를 골탕먹이고 재산을 빼앗기 위해 문제를 낸다. 깨진 항아리를 주고 그 항아리에 물을 채우면 남편을 풀어 주겠다고 약속한다.

 

농부의 아내는 항아리에 물을 붓지만 부어도 부어도 채워지지 않았다. 깨진 항아리에 물이 채워질 리 없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너무 슬퍼서 주저앉아 울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이 지나가다 우는 이유를 묻는다. 사정을 듣고 난 사람은 ‘그렇게 쉬운 일 가지고 왜 우십니까?’ 하고는 깨진 항아리를 연못에 풍덩 던져 버렸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자 이제 항아리에 물이 가득하죠?”

 

그리고 나그네는 길을 떠났고, 사또는 농부를 풀어주었다고 한다.

 

인간은 깨진 항아리다. 기도는 그 어떤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인간의 종교성이다. 오직 하나님으로만 채워진다.

 

기도는 내 안에 하나님을 채우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란 바다에 자신을 ‘풍덩’ 던지는 행위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 것이며, 또한 기도를 기뻐하신다.

 

“주님은 우리의 울부짖음을, 외침을 듣고자 하시며 우리가 이해한다고 여기는 것과 이해하지 못한 것에 관해 이야기하기를 바라십니다(24쪽).”

 

그리스도인다운 삶은 기도하는 삶이다. 칼뱅은 진정한 신학은 기도로 드러난다고 했다. 기도 없는 믿음 생활은 존재하지 않으며, 믿음 없는 기도 또한 허상에 불과하다. 그러니 ‘삶이란 결국 기도(25쪽)’이다. 기도는 삶이고, 삶이 곧 기도다.

 

“우리는 물을 두려워한 나머지

일시적인 대피처로 만든 방주를

영원한 집으로 삼으려 합니다.

그러나 이때 당신께서는

방주를 떠나라고 명령하십니다(31쪽).”

 

물은 정결을 의미하지만, 죽음을 전제한다. 기도는 죽는 것이다. 죽지 않고 기도할 수 없다. 그러니 방주를 떠나야 한다.

 

기도는 관계의 각성이다. 하나님은 성도의 기도를 듣고 싶어 하신다. 그가 가진 고민, 걱정, 번뇌, 슬픔, 기쁨, 행복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하신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가. 다 아시면서 알고 싶어 하시고, 다 보고 계시면서 끊임없이 기도의 자리로 부르신다.

 

우리는 기꺼이 그 분 앞에 우리의 고민과 걱정을 털어 놓아야 한다. 우리의 기도가 공기의 진동으로 사라지지 않고 하늘의 보좌를 흔들 수 있다는 것이 기적 아니겠는가.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자의 음성을 들으신다.

 

“당신께 기도드릴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특별한 일인지요.

당신 앞에 우리가 짊어진 짐을 내려놓고,

걱정을 풀어 놓고,

비통과 슬픔을 털어놓을 수 있다니 말입니다(34쪽).”

 


▲ⓒPatrick Fore on Unsplash

 

기도는 닮고자 하는 갈망이다. 기도는 하나님을 추구한다. 기도는 기도자의 부정이자 죽음이며, 존재의 소멸이다. 바로 그렇기에 가장 존재론적 실존을 되찾는 자리다. 기도는 하나님으로 덮어씌워지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진리의 영이시여,

예수의 삶을, 예수라는 생명을 바라보게 하셔서

우리를 향한 당신의 뜻을 깨닫게 하소서.

그 분을 닮아, 당신의 선한 법을

가르치는 이가 되게 하소서.

그분을 닮아, 기적과도 같은 치유를 행하게 하소서.

그분을 닮아, 당신의 나라를 선포하게 하소서.

그분을 닮아, 가난한 사람과 버림받은 사람,

어린 아이들을 사랑하게 하소서(42쪽).”

 

기도는 명징한 진리를 추구한다. 삶은 모호하다. 그러나 모호한 삶은 명백한 진리를 통해 하나님을 드러내야 한다. 게으름과 욕망, 나약함과 타성은 일상의 모호함 속에 자신을 숨긴다.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가 사람을 더 두려워하기 때문(72쪽)’이다. 기도로 채워지는 삶은 하나님, 즉 하나님의 말씀을 추구한다. 그것은 이 세상의 어떤 것도 하나님보다 더 크지 않음을 선언하는 존재의 고백이다.

 

“예수의 삶과 죽음, 부활을 통해

당신은 이런 우리를 사정없이 뒤흔들어

진정 두려워해야 할 이가 누구인지를 일깨우시지만

그럼에도 교묘하고, 교활하고, 교만한 백성인 우리는

당신께서 보여주신 그 구체적인 진리를 보기보다는

모호함에 빠지는 편을 선호합니다(72-3쪽).”

 

어느 것 하나 허투루 읽히지 않는다. 일상, 질투, 욕망, 단순함, 평범한 삶을 하나님께 드린다. 기도의 힘은 정직함에 있다. 화려한 수사나 심오한 철학적 사변이 아니다.

 

저자는 자신이 알고, 경험하고, 이해하는 삶과 세상에 대한 마음을 하나님께 올려드린다. 마지막으로 아내가 감명있게 읽었다는 고양이에 대한 기도문을 올리며 마친다.

 

-고양이 터크의 죽음을 기리며-

(터크는 샴고양이며 20년을 살았다. 자신도 그렇지만 아내가 사랑했던 고양이다. 1996년 10월 17일 터크는 세상을 떠났다.)

 

“뜨거운 마음을 가지신 주님,

당신은 우리 중 하나가 되어 우리를 찾아오심으로

당신께서 우리의 사랑을 바라심을,

그 끝없는 갈망을 드러내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우리는 당신께서 지으신 피조 세계,

피조물들을 사랑하며

당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웁니다.

모든 참된 사람은 모든 당신에게서 비롯됨을 믿습니다.

우리를 향한 터크의 사랑,

터크를 향한 우리의 사랑은 모두 당신께서 주신 사랑을 밝히는 불이 됩니다.

우리는 그렇게 당신의 사랑에 참여합니다.

터크의 멋진 삶을 허락하신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당신을 찬미합니다.

터크의 침착함, 품위, 용맹함, 유머, 욕구, 인내,

그는 언제나 ‘곁에 있어’ 주었고

덕분에 우리는 더 나은 사람이 되었으며

서로를 더 사랑하게,

그리하여 당신을 더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터크가 그립습니다.

상실감으로 인해 그를 기억하기를

두려워하지 않게 하소서. …”

 

우리의 모든 삶이 주님을 향한 기도이기를.

 

정현욱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인, 에레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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