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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완전한 사랑과 은혜에 무지했던 단 한 사람, 요나

[크리스찬북뉴스 서평] 요나보다 더 큰 이, 그 탕부(蕩父)에게로 |

조회 59|2019-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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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켈러의 방탕한 선지자

팀 켈러 | 홍종락 역 | 두란노 | 320쪽 | 16,000원

 

본서를 두 번 읽었다. 한 번은 순수한 독자로서 책을 통해 배우고자 읽었고, 또 한 번은 서평을 위해 군데군데 찾아가며 꼼꼼히 읽었다. 그러고 나서야 프롤로그의 소제목에 고개가 주억거려진다. ‘우리가 미처 몰랐던 요나!’

 

정말 그랬다. 안다고 생각했지만, 나 역시 충분히 알지 못했다. 큰 물고기 뱃속에서 3일을 보낸 요나의 이야기는,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나 삼손 이야기 등과 함께 호기심 가득한 어린 시절의 동심을 만족시키는 주일학교의 단골 메뉴였기 때문에 우리에게 익숙하다.

 

하지만 고래든지 상어든지 그 커다란 물고기가 요나서의 다층적이면서도 심오한 메시지마저 다 삼켜버려서 그런지, 그저 그것뿐이다.

 

그러나 비평학자들의 회의의 배 밑바닥에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요나를, 천진한 교인들의 호기심이라는 큰 물고기 뱃속에 갇혀만 있던 요나를, 우리 시대의 탁월한 설교가 팀 켈러가 성경의 메시지 그대로 되살려냈다.

 

그가 프롤로그에서 밝힌 바, 30년 동안 전혀 다른 상황 가운데 전혀 다른 청중들에게 세 차례 요나서 전체를 강해했던 경험이 바탕이 되었겠으나, 그는 여전히 철저하고도 꼼꼼한 본문 연구와 복음에 대한 확고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 신선하고 신령한 통찰, 그리고 오늘날 우리 시대의 적실한 문제와 연관 짓는 노련함으로, 우리 앞에 묵직하고도 강력한 메시지를 내놓은 것이다.

 

먼저, 요나서가 단순한 우화가 아닌 절묘하고 정교하게 구성된 문학 작품임을 소개해 주는 그의 문학적 안목이 눈에 띈다. 1장과 2장이 하나의 이야기 세트를 이루고, 다시 3장과 4장이 또 다른 세트가 되어, 거의 완전한 평행구조로 서로 절묘하게 대칭을 이루고 있음을 서두에서부터 명시함으로써, 요나서를 바라보는 올바른 관점을 갖춰준다(10-11쪽).

 

또한 요나서의 주요한 특징으로 열린 결말을 지적하면서, 결국 요나의 이야기를 읽고 있는 우리 자신이 이 하나님의 마지막 질문에 대해 각자의 대답을 내놓아야함을 요구한다(173-175쪽).

 

게다가 비록 간략하지만 실감나게 당시 앗수르와 이스라엘의 적대적 관계 및 앗수르의 잔인무도함을 알려줌으로써, 요나가 느꼈을 그 당혹감과 거부감에 공감하며 이야기에 빠져들게 한다.

 

본문을 꼼꼼히 읽어내는 작업을 통해 요나서의 역설적 진리들을 드러내 준다. 이를테면 잠든 요나를 선장이 깨울 때, 하나님께서 요나를 부르실 때 사용한 것과 동일한 단어들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통해, 그 자신이 하나님을 전해야 할 하나님의 선지자가 도리어 이교도로부터 하나님의 메시지를 듣게 된 상황이 되었다는 것은 가히 충격적이다(55쪽).

 

“요나의 반(反)선교활동은 아이러니하게도 도리어 비이스라엘인들의 회심을 가져왔다”는 문장은 요나의 역설적인 특징을 잘 보여준다(92쪽).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하게 된 요나의 상황에 대한 성경 묘사의 점층적인 면을 놓치지 않은 점도 주목할 만하다. 욥바로, 배 밑바닥으로, 물고기 뱃속으로, 깊음 속 바다 가운데, 산의 뿌리, 그리고 바다의 심연 속 더욱 아래 스올의 뱃속으로까지 끝없이 가라앉고 있는 요나를 잘 보여준다(95-96쪽).

 

그럼으로써 “물에서든 믿음에서든 마침내 오르기 시작하려면 먼저 그의 한계에 이르러야 함을, 올라가는 방법은 다름 아닌 내려가는 것임을, 하나님의 은혜의 가장 큰 신비를 배우는 곳이 밑바닥”이라는 역설적 진리는 더욱 선명해진다(99쪽).

 


▲저자 팀 켈러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그렇다면 이와 같이 문학적이고 역사적이며 성경적인 성실한 작업을 통해 그가 되살려낸, 우리가 미처 몰랐던 요나의 이야기는 과연 무엇인가? 요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듣게 되는 진짜 이야기는 무엇인가?

 

첫째, 가장 근원적이고도 우상숭배적인 불신의 문제가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다. 니느웨로 가라는 분명한 하나님 말씀에도 불구하고, 요나가 정반대 방향으로 가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명령이 자신의 신학적 기준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임무도, 또 그 임무를 맡기신 분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26쪽).

 

하나님의 명령에 내가 납득할 만한 타당한 근거를 찾을 수 없다면 거기에 순종할 수 없다고 결론내리는 것은, 결국 하나님보다 자기를 신뢰하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불신의 양상이 적극적인 악의 선택이 아니라 오히려 대단히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사람이 되는 것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는 주장은(29-31쪽), 자신의 공로를 통해 하나님을 통제하려는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참으로 주요한 메시지다.

 

결국 하나님을 거부하고 달아나는 이유는, 단순히 신학적인 문제 그 이상으로 우리 마음의 문제임을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둘째, 하나님의 사랑이 아닌 다른 것에서 우리 존재 가치를 세우려는 우리의 얄팍한 정체성, 그리고 거기에서 비롯하는 배제와 타자화, 비인간화의 경향이 우리 모두에게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3-4장).

 

이는 오늘날 다양한 형태로 변종되어 나타나는데, 요나가 그랬듯이 민족주의 내지는 종교적 우월주의 형태로, 아니면 다른 어떤 이들에게는 학벌주의나 인종주의, 이념과 정당 대결 등의 형태로도 나타날 수 있다.

 

특히 요나와 요나보다 더 선량한 이교도들에게서 발견되는 대조적인 모습을 통해 건네는 메시지는 대단히 중요하다. 오늘날 복음에 대한 편협하고 그릇된 이해로 인해 비신자와 불신 세상에 대해 무감각하고 무례하며, 아예 현실을 도외시하여 도시와 공공선, 사회 개혁 등에 전혀 무관심한 기독교인들이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회개를 사회적인 측면으로 접근하여, 비록 니느웨가 최종적인 용서나 구원은 받지 못했더라도 그들이 제국주의나 잔혹함, 사회적 불의에서 돌이킨 것이 하나님 말씀의 능력이었다는 사실을 밝힌 것 역시 주목할 만하다.

 

이는 사회 개혁이나 변화가 능력 있는 하나님 말씀의 결과라는 것을 밝혀주는 것이며, 나아가 두려움 없이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일과 사회적 개혁과 정의 구현을 위해 헌신하는 일이 신학적으로 분리될 수 없음을 증명한다(125쪽).

 

팀 켈러는 본서의 여러 장에서 상당한 분량을 할애해 이와 관련된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 만약 우리가 이 엄중한 메시지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우리의 참된 정체성을 그분이 우리를 아는 그 참된 지식 위에 두지 않는다면, 요나처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선지자로 전락해, 편협하고 옹졸하여 초라한 모습으로 도리어 그분을 불명예스럽게 할 것이다.

 

셋째, 이 책의 백미(白眉)로서, “요나보다 더 큰 이가 계시다(마 12:41)”는 최종적이고도 궁극적인 이야기다. 요나가 타인을 배제함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하려 했다면, 예수님은 우리와는 전혀 다른 온전한 타자임에도 우리와 같이 되셨다(233쪽).

 

또한 선원들을 위해 자신을 큰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로 던지라는 요나의 이야기는 결국 진정한 원형적 사랑은 대속적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는데, 그런 점에서 우리 예수님의 자기 희생적인 사랑은 요나의 그것보다 훨씬 더 크고 완전하다(83쪽, 86-92쪽).

 

요나는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는다 할 수 있으나, 예수님은 죄 없으신 분으로 죄인들을 위해 하나님의 정죄를 온전히 받으셨으며,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셨다.

 

요나는 뱃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바다 깊이 내려갔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죽음 곧 하나님과의 분리라는 심연 속으로 들어가셨다.

 

요나는 도시 때문에 울지 않았지만, 예수님은 예루살렘 도성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셨다. 요나는 성의 멸망을 보러 성 밖으로 나갔지만 우리 주님은 그 도시를 구원하시고자 영문 밖으로 나가셨다.

 

특히 여전히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은혜에 무지해 잔뜩 뿔이 난 요나를 이해시키는 마지막 장면에서, 폭력적인 이교도들을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이들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모습은, 요나의 그릇된 태도와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것이다.

 

‘긍휼’이라는 단어가 뜻하는 바, 그들의 죄에 모종의 방식으로 연결되어 하나님이 마음 아파하시고 고통받으신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 모두의 죄 때문에, 무죄한 예수님이 죄가 되셔서 십자가에서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받으셨다.

 

요나에게는 도저히 풀리지 않는 모순이요 그의 불순종의 이유였던 하나님의 자비와 하나님의 심판 사이의 부조화는,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던 성자 하나님을 통해서야 비로소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인한 것임이 분명히 드러나게 된 것이다.

 

결국 요나 이야기는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과 은혜에 무지한 한 사람, 그리하여 옳고도 아름다운 그분의 말씀을 버리고 하나님을 피해 달아나는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탕자이기도 하고, 탕자의 형이기도 하다. 또한 그는 나이기도 하고 당신이기도 하다. 그리고 요나 이야기는 그러한 최악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침내 선하고 자비로운 사람이 되게 하시는, 자신의 선함과 자비로움을 온전히 나타내신 자비로운 하나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현대 사회가 직면하는 심각한 문제들에 도전하며, 인간 존재의 기만적인 특징을 예리하게 포착해 여지없이 폭로하면서도,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에 충실하며 그 변화시키는 능력을 확신하는 팀 켈러가 들려주는 방탕한 선지자(The Prodigal Prophet)의 이야기이다.

 

요나보다 더 큰 이, 그 탕부(蕩父, The Prodigal God: <팀 켈러의 탕부 하나님(두란노)>과 본서를 같이 읽으면 더욱 유익하고 풍성한 독서가 되겠다)에게로 돌아가 그분의 은혜를 이해하고, 그로 인해 변화를 이루는 여정을 또 다시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나상엽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 국어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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